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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월의 독립운동가 ‘이대위 선생’ 선정

독립기념관, 공훈 기리는 특별 전시회도

기사입력 2018-05-30 오전 11:27:5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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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이대위. (사진= 독립기념관/SNS 타임즈)

 

[SNS 타임즈]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이대위 선생을 2018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대위는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중등교육 과정을 마쳤다. 미국 유학 이전 기록이 충분치 않으나 1890년대 기독교를 수용하고 숭실학당에서 중등교육을 수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등교육과 신앙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미국 유학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대위는 안창호와 함께 한인 친목회 결성에 참여했다. 친목회는 샌프란시스코 한인동포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서로 도와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결성됐다. 1905년 이주 동포들이 늘어나며 친목회는 공립협회로 확대·개편됐다. 같은 해 6월 이대위는 학업에 정진하기 위해 포틀랜드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공립협회 직임은 맡지 않았으나 신민회 조직을 준비하는 안창호에게 도움을 주었다.

 

1908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캘리포니아대학교에 입학하고 학업과 사회활동을 병행했다. 그는 공립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공립협회는 1909년 국민회로 개편되고 1910년에는 대한인국민회로 재탄생한다. 이대위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겸 총무를 맡으며신한민보대도에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기독교 신앙을 강조하는 논설을 발표했다.

 

1913 4월 이대위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선출되며 한인동포 권리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같은 해 6월 캘리포니아 농장에서 한인노동자가 축출당하고 이 사건에 일본공사관이 개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대위는 미국 국무장관에게 한인이 경술국치 이전부터 미국에서 거주한 것을 이유로 해당 사건을 일본과 교섭치 않길 요청했다. 결국 이대위의 요청이 미국 정부에 수용되고, 이는 미주한인의 법적 지위와 국적 문제 해결을 위한 중요한 조치가 됐다.

 

이대위는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여러 차례 재임됐으며 신문과 잡지를 통한 언론활동에 주목했다. 동포의 도덕심과 학문을 발달시키는 방법이 신문과 잡지에 있음을 강조하며신한민보편집과 발간에 참여하였다. 1915년에는 한글식자기를 개발해 미주 한인사회 출판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학생양성소와 국어학교를 설립해 미주한인 교육을 장려했다.

 

1919년 국외에서 활동하는 지도급 독립운동가 39인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미주에서는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이대위 4명이 서명했다. 이를 통해 미주에서 이대위가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정부는 미주 한인사회를 위해 헌신한 이대위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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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령 기자 (editor@sns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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