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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 삼전도 굴욕비와 문 정부의 편향 외교

추상(秋霜)논객 이상일의 ‘일침’

기사입력 2019-05-14 오후 2:35:4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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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타임즈] 문재인 정부는 지나친 친중 외교로 기울어져 있다. 대한민국이 살 길은 좌향 진영이 선호하는 친중 정책도 아니고, 보수가 선호하는 친미 정책도 아니다.

 

▲ 오른편 빈 좌대가 규모를 적게 만들어 청국 공사 감독관으로 부터 재시공 지적을 받았던 최초의 비 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이상일 논설고문/SNS 타임즈)

 

송파구 석촌호수 동호 주변, 롯데 본사 쪽에는 "삼전도 굴욕비"가 서있다. 석촌 호수 주변을 산책하며 시간적 여유가 있어 그 비문을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시대적 배경은 그 유명한 병자호란이다.

 

1636년 병자년 당시 청 태종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인조에게 형제지맹의 관계에서 군신지의로 바꿀 것을 요구하며 12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광해군은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해왔는데, 인조가 명나라로 기울자 침략의 빌미를 주게 된 것이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할 겨를도 없이 남한산성으로 군사 12천명과 함께 피신했다가 식량이 떨어지고 기다리던 의병들이 오질 않자 48일만에 항복하는 굴욕을 역사에 남겼다.

 

항복하기 전 남한 산성 성안에서는 계속 항전하자는 척화파와 내일을 기약하기 위해 항복하자는 주화파 간에 목숨을 건 또다른 싸움이 벌어졌다.

 

후일을 기약하자는 이조판서 최명길과 구차한 삶을 위해 치욕을 감수할 수 없다는 예조판서 김상헌 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다들 쓰길 꺼리는 항복문서를 직접 쓰는 최명길과 이에 반대하는 김상헌 간의 말싸움이 불꽃을 튀겼다고 한다.

 

아래 대화는 김훈의 소설 남한 산성에서 인용한 글이다.

 

김상헌이 "적이 비록 성을 에워 쌓다 하나 아직도 고을 마다 백성들이 살아 있고, 또 의지할 만한 성벽이 있으며, 전하의 군병들이 죽기로 성첩을 지키고 있으니 어찌 회복한 길이 없겠습니까? 전하 명길을 내치시고 근본에 기대어 살길을 열어 나가소서"

 

이에 최명길은 "상헌은 제 자신에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옵니다. 이제 적들이 성벽을 넘어 들어오면 세상은 기약할 수 없을 것이온데, 상헌이 말하는 근본은 태평한 세월의 것이 옵니다.

 

세상이 불타고 무너진 풀밭에도 아름다운 꽃이 피어날 터인데, 그 꽃은 반드시 상헌의 넋일 것이 옵니다. 상헌은 과연 백이 이오니, 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하옵니다. 전하의 성단으로 신의 문서를 칸에게 보내 주소서"

 

김상헌은 두손으로 머리를 싸 쥐고 소리쳤다. "전하, 명길의 문서는 글이 아니 옵고~~"

 

최명길이 김상헌의 말을 막았다. "그러 하옵니다. 전하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 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 가셔야 할 길 바닥 이옵니다."

 

그날 밤중에 임금은 승지를 불러서 문서에 국새를 찍었다. 그리고 다음날 임금은 신하를 이끌고 항복하러 성밖으로 나간다.

 

청 태종은 9단으로 쌓은 단위에 있고 인조는 땅바닥에 엎드려 세번 절하고 땅바닥에 이마를 짛는 "삼배구고두" 라는 항복의식을 치룬다.

 

그러자 청 태종이 항복하고 신하의 나라가 된 기념 선물로 돈피 옷 두벌을 건네자 인조는 또 그 중 한 벌을 입고 또 세번 절하며 사례한다. 그후 청 태종은 승전기념비를 세우라고 한다.

 

▲ 서울 석촌호수에 자리한 삼전도 굴욕비 안내판. /SNS 타임즈

 

그때 세워진 비가 "삼전도 굴욕비".  정식 명칭은 "대청 황제공덕비"라 한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대군과 왕자, 대신, 삼학사를 비롯해 여자 50만명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이 삼전도 굴욕비 비문은 만주어, 몽골어, 한문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장을 보면 비석이 올려져 있지 않은 받침대가 하나 더 있다. 이것이 처음 제작된 것인데, 규모가 작다고 청이 거부해 다시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후 이 굴욕적인 비석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동학농민 혁명 진압을 위해 진주한 일본과 청국간에 1894년 청일 전쟁이 벌어지고, 그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했다. 그때부터 그 비석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다.

 

고종 때 땅속에 묻혔다가 일제 때 다시 세워지고, 이승만 정부 때 수치라고 문교부에 의해 다시 땅속에 묻혀졌다가 홍수로 다시 밖으로 나오자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이후 이곳 저곳을 떠돌 다, 다시 원래 장소 근처인 현재 위치에 자리 잡았다.

 

삼전도 굴욕비의 원래 장소는 석촌 호수 서호 중간쯤, 그 당시 한강 나루터로 추정된다. 1970년대 한강 개발로 한강 물줄기가 끊기고 호수가 된 자리다.

 

E. A Carr 가 정의한 것처럼,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과거 역사로부터 현재는 교훈을 얻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나친 친중 외교로 기울어져 있다. 대한민국이 살 길은 좌향 진영이 선호하는 친중 정책도 아니고, 보수가 선호하는 친미 정책도 아니다.

 

이에 대한 해법이 바로 균형 외교임을 단적으로 지적하고 싶다. 과거 조선의 잘못된 판단과 처세에서 비롯된 병자호란으로부터 역사적 교훈과 해법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국격에 어울리지 않는 아마추어 수준의 외교로 비난 받고 있는 현 정부, 그리고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이전투구식의 정쟁을 벌리고 있는 정치권. 그리고 끝없이 분열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삼전도 굴욕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도 크게 다가오는 때이다.

 

 

- Copyright SNS 타임즈

이상일 논설고문 (editor@sns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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